박사가 사랑한 수식
작가: 오가와 요코
사실 이 블로그는 읽은 책 후기도 쓰고 낙서도 하고 글도 짓고 여러모로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적으려고 시작한건데
뭔가 가면 갈수록 가사 번역만 하는 블로그가 된 것 같아서...정신 차리고 책 후기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꽤 유명한 일본 소설입니다.
(아니 이 시국에?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샀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은 맞지만 이번에 필독 도서이기도 해서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해봅니다.
참고로 제 처음 책 리뷰였던 디어 에번 핸슨은 차마 다시 읽지 못할 정도로 거지같아서 이번에는 포맷을 조금 바꾸기로 했습니다. 줄거리는 거의 소개 안하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로... 제가 줄거리 요약에는 소질이 없더라구요.
약간의 tmi를 좀 뿌려보자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습니다.
그렇다고 뭐 영재였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는데, 그냥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뭐야?'라는 질문을 들으면
'음...수학?'이라고 대답할 정도로요. 일단 어렸을 때는 식을 막 세우면 휘리릭하고 답이 나오는게 신기해서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초반까지는 국어랑 영어가 싫어서 좋아했고, 그 이후로 한동안은 정말 순수하게 수학이 멋있고 재밌어서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마저도 아니지만....어쨌든 한동안은 새로운 공식을 배우고 거기에 문제를 대입해서 풀면 답이 나오는 메커니즘이 너무 재밌어서 진지하게 수학과를 지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내신 수학 공부에 좀 지쳐서 수학은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된 후로 제가 좋아하던 수학의 느낌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해서 많이 신기했습니다.
제가 지금 책을 바로 옆에 두고 쓰는 글이 아니라서 정확한 페이지수나 단어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제 뇌에 콱 박힌 구절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노교수가 한 말인데, 대충
'수학은 신의 노트를 훔쳐보는 것이다. 진리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그것을 찾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모든 정답은 신만이 알고 있고, 그 진리를 찾는 것이 수학이다.'
요런 느낌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딱 읽는데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감탄이 나오더군요. 감동을 받았다던가 심장이 일렁거리다던가 그런 종류의 감탄은 아니었지만, 그냥 머리가 띵했습니다.
사실 수학이 저한테 가장 재밌으면서도 고통스러운 과목인 이유는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 풀리는 문제가 있더라도 언젠가는 답이 나오는 걸 알지만, 풀이가 맞더라도 숫자 하나만 삐끗하면 얄짤없이 점수가 깎인다는 뜻이죠. 덜렁거리기 일수인 저로서는 이런 점이 양날의 검입니다. 공부할 때는 나름 즐겁지만 시험만 봤다 하면 점수가 안나오고...또 개인적으로 공부할 때 열등감이 가장 많이 드는 과목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머리 회전이 저보다 빠른 친구들은 진도도 빠르고 정확도에서 확실히 차이가 나는지라 그 차이가 눈에 확 띄게 보이는 게 가끔은 좀 많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풀었는데 점수가 안나오는 날에는 억울해서 울컥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의 본질은 오로지 답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고 그 뒤에 답이 있으면, 그 둘을 잇는 무수히 많은 선들을 찾아내고, 오류를 밝혀내고,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문제에도 그 문제를 푸는 방법은 밑도 끝도 없습니다. 직관으로 풀든, 대입해서 풀든, 또 바로 풀든, 빙 돌아가서 풀든 답은 언젠가 나옵니다. 그런 무수한 풀이들을 발견하고 응용해가면서 그 속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것. 이런게 수학의 참된 재미 아닐까요.
책 속의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현재는 가정부 일을 하면서 아들과 함께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여성입니다. 배움이 길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은 노교수와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수학과 교수의 이야기들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어린 아들 '루트(작중 별명)'도 노교수를 할아버지처럼 여기면서 그로부터 신기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노교수는 둘로부터 가족애를 느끼게 됩니다. 사실 굉장히 전형적인 일본 소설이라서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호불호가 꽤 갈릴 듯 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이 책에서 수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노교수(많아봤자 형수?) 하나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주인공들은 수학 앞에 동등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도,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가정부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노교수도 문제를 풀 때만큼은 그냥 문제를 푸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이 책에 매료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수학은 사람을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냥 수학을 좋아하느냐 아니냐, 그것만 중요할 뿐이죠. 그런 점에서 답을 내기에 급급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또 다시 한 번 수학에 도전해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문제를 틀리는 게 너무 두려워서 수학이, 문제를 푸는 게 무서워지기 시작한 저한테는 참으로 큰 변화입니다.
저는 물리도 참 좋아합니다.
물리도 수학과 참 비슷하게 공부하다 보면 현실과 동떨어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점수내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냥 왠지 문제를 풀다 보면 현실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물론 세상엔 재미있는게 많지만,
어쩌면 공부가 재밌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 정도로요.
하지만 어느 순간, 물리도 하기 싫고, 수학도 풀기 싫다는 생각이 든 저에게, 이 책은 어찌 보면
하나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다시 한 번 학문을 학문답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해줬달까요.
여러분도 공부가 너무 하기 싫다면, 성적이 나오지 않는 나 자신에게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면,
한 번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굳이 지금 공부를 업으로 하고 계시지 않아도, 마음 한 켠에
늘 수학에 대한 갈망이 있으신 분이시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번 후기는 정말 책과 동떨어진 내용이네요,
그냥 요즘 공부 때문에 우울하기도 하고,
문제집을 피고 싶지도 않은 그런 시기가 와서 참 힘들다고 생각했던 찰나에 이런 책을 읽게 되서
반갑다는 생각으로 몇 줄 적어봤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읽으셨다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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