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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책

책 [내 이름은 빨강] 후기

오랜만에 서평(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는 아무말대잔치)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시험기간에 책 읽고 글쓰고 이러고 있는 게 맞나....싶긴 하지만

역시 공부 빼고는 전부 재미있게 느껴지는 시기답게 현타는 고이 접어 나빌레라 했습니다.

 

오늘 리뷰할 책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입니다.

제가 읽은 민음사판 기준으로 총 두 권인데요,

워낙 어려운 책인 것에 더불어 제가 여러 이유로(입시, 여행, 기타 등등) 1권과 2권 사이에 상당한 텀을 두고 완독했기에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쓰는 이 리뷰가 얼마나 중구난방이 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왠지 모르게 한 번은 천천히 정리를 해보고 싶어서 시작하게 된 글이니

그리 논리적일 필요는 없겠다 싶기도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알쓸신잡>을 통해서였습니다.

김영하 작가님이 간략하게 요약해주신 내용이 너무나도 흥미로워서

(원근법의 도입과 함께 신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는 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정도로 정리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메모장에 적어놓았다가 한참 뒤에 도서관에서 빌려왔었는데,

정말....힘들게 끝까지 읽었습니다.

 

저는 집중력이 정말 약하지만 읽는 속도가 빨라서 집중력이 다하기 전에 책을 단숨에 끝내버리는 편인데요,

[내 이름은 빨강]은 마치 비문학 독해를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꾸역꾸역 소화했습니다.

입에 쓴 한약을 억지로 조금씩 삼키는 느낌이랄까요?

 

애초에 '살인사건'이나 '추리'같은 키워드만 듣고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를 떠올렸던 것부터 단추를 잘못 꿰지 않았나...싶습니다.

이 소설에서 살인이라는 요소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에 불과합니다.

책 속에는 격변하는 시대 상황과 장인 정신에 대한 작가의 해석 및 고찰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메인 사건인 살인은 이를 표상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이죠.

 

간단히 줄거리를 추려보자면,

어느날 '엘레강스'라는 이름의, 책에 금박을 입히는 일을 하던 궁정 소속 장인 하나가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모부인 에니시테(이름이 아닌 호칭이지만 편의상 사용)의 부탁을 받은 '카라'는 범인을 밝히기 위해 오랜만에 이스탄불을 찾습니다.

카라는 이모부의 딸이자 그의 옛사랑이었던 '세큐레'와도 재회하는데,

전쟁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에 뒤이어 남편의 동생인 '핫산'의 구애에 시달리던 세큐레는 두 아들 '오르한'과 '셰브켓'을 데리고 에니시테의 집에 기거하다 카라와 또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물론 세큐레는 카라와 사촌, 핫산과는 형수와 도련님 관계이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이해하려하면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지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면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서 카라는 화원장 '오스만'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듣고 궁정 소속 화가 '나비', '황새', '올리브' 중

엘레강스를 죽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결국 책을 이루고 있는 핵심 줄기들은 카라와 세큐레의 이야기, 그리고 범인을 찾기 위한 카라와 화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이야기도 결국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만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혼재하던 시기였습니다. 작중에서도 콕 집어 베네치아가 등장하지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의 움직임은 유럽을 넘어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터키의

화가들은 처음으로 신이 아닌 인간이 주체가 되는 그림을 접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터키에서 그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저는 터키의 문화에 대해 지식이 부족해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에 등장하는 궁정 화가들에게

그림이란 곧 신과 술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코란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를 화가 개인의 개성 즉 스타일이 드러나지 않게끔, 자신의 서명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밀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화가로서의 미덕이었던 것이죠.

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다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최고의 포상이었습니다.

자신의 헌신에 대한 영광의 훈장이자, 보지 않고도 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시였죠.

 

그러다 어느날, 에니시테는 술탄의 명이라며 궁정화가들과 함께 한 권의 책을 만들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유럽의 화풍이 결합된 그림들을 담기로 했고,

이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음에도 화원장 오스만을 비롯한 몇몇의 반감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화집 제작에 동원된 엘레강스가 우물 안의 시체로 발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니시테 역시 자신의 집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명을 가진 보수적인 입장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의 입장 간의 대립이 주를 이룹니다.

원근법 등을 도입하며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고자 하던 유럽 신진 화가들의 노력은 한 사람만을 조명하는 초상화로까지

이어졌고,

우상숭배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종교적 특성상 인물화는 커녕 술탄이나 절대자 이외의 인물을 화폭 중간에 크게 담는

것조차 터부시되던 터키의 장인들에게 이는 여러 의미에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명 화두가 되고 있는 문제가 뭔지는 알겠는데

각 인물들이 정확히 어떤 입장인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문체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높은 확률로) 저의 부족한 독해력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보다도 새로운 화풍의 도입에 회의적이었던 화원장 오스만마저

어떤 맥락에서는 그 영향력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내보였던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제게는 각 인물들의

심리가 뚜렷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책을 끝낸 지금 와서는, 오히려 작가가 이런 혼란을 의도적으로 내비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세큐레의 서술이 이를 더욱 뒷받침하기도 하구요.

 

세큐레는 두 점의 그림이 그려지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초상화, 하나는 행복한 여인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기억력 이슈로 생략)

그러다 그녀의 아들 중 하나가 그런 그림은 그릴 수 없다고 말하죠.

터키의 화가도, 베네치아의 화가도 저마다의 이유로 그 그림이 완벽해지려면 필요한 요소들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한 그림은 그릴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식이 모두 필요하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결국 이 모든 사건, 두 입장 간의 갈등과 이에 스러진 두 사람의 목숨 뒤에는

화합만이 해결책이라는 작가의 견해가 담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책 제목이 [내 이름은 빨강]일까도 참 좋은 질문입니다.

이 책은 전개 방식이 참 독특한데요,

카라, 세큐레, 에니시테, 등 직접적으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부터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살인자,

이미 죽은 시체, 악마, 심지어는 커피숍의 개와 이름 그 자체인 '빨강'까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념과 사물들이 챕터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나는 카라', '나는 에니시테', '내 이름은 빨강' 같은 제목으로요.

 

그래서 챕터 '내 이름은 빨강'은 무슨 내용인가 보면,

결국은 자기 자랑입니다.

자신의 쓰임새, 제조 방법, 역사 등 셀 수 없는 각도에서 오만하게 자신을 뽐냅니다.

저도 이 부분을 다 읽은 후 그래서 왜 이게 제목인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요.

어쩌면 어디서나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존재하는 빨강은 이 책을 관통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즉 예술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문학상 수상 작품은 정말... 어렵습니다.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는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나

노벨문학상 기념 굿즈가 탐나 샀던 페터 한트케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들 모두

이건 범재의 머리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겠구나 했었는데,

[내 이름은 빨강] 역시 어영부영 끝내기는 했으나 이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몇 년은 거뜬히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사실 평생을 쏟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확답도 못하지만요.

 

저희 아버지가 예전에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나네요.

언젠가 전공 수업 때 과제로 풀어야했던 문제가 있어 논문을 읽었었는데,

너무 어려워 저자 연혁을 보니 자신과 같은 나이에 해당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이 사람은 내 나이에 이걸 직접 썼구나' 싶어 허탈했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는 저와

이런 책을 써냈고 써내고 있으며 써낼 예정인 사람들이 같은 행성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늘 책을 읽는 목적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종교가 없어 사후 세계나 신을 믿지 않는데요,

그런 제게 죽음은 그냥 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꿈을 제외하면) 블랙 아웃이 되는 것처럼,

또 로봇의 전원을 끄는 것처럼 그렇게,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아무리 천재적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직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 조금이라도 더 사유하고 생각하고자 책을 읽는 것이니

내 못난 머리를 너무 탓할 필요는 없다, 자기 위로를 하고는 합니다.

오히려 내가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천재들이 써놓은 책을 읽기만 하면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으니, 노력 대비 가성비가 이쪽이 훨씬 좋은 편이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정말 아무말대잔치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글을 쓰니 후련하기도, 다가올 시험 준비에 갑갑-하기도 하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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